본 논문은 1960년대 강신재와 박경리의 소설에서 증여 방식을 젠더수행적 차원에서 규명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교환’이라는 가장 기초적인 경제적 차원에서 사회구성의 문제에 접근하고, 이 교환과정에서 사회구성원 간에 이루어지는 ‘결속’과 ‘해체’를 들여다봄으로써 1960년대의 정치성을 새롭게 사유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를 통해 문학장 속에서 대중성과 통속성의 맥락 안에서만 주로 이해되어 온 1960년대 여성 장편들을 적극적으로 재의미화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으며, 당대 헤게모니적 질서의 해체와 함께 새로운 정치성을 발굴해냈다.
1960년대 여성장편소설 안에서 증여방식이 젠더수행성과 결합하며 어떤 공동체적 이상을 만들어갔는지 읽어내는 작업은 당대 현실에서나 소설적 재현에서 잘 드러나지 않았던 여성들의 정치적 대응에 대해 주목할 수 있도록 한다. 그들이 지니고 있던 공동체에 대한 이상은 자본-민족의 네이션으로 포섭되지 않는 정치적 가능성에 대한 꿈이었다. 이를 구체적으로 읽어내기 위해 본 연구는 6·25 전쟁, 4·19 혁명, 5·16 쿠데타 이후의 서사로 나누어 1960년대 문학장에서 미학적 · 정치적 가치 평가에서 모두 소외되어온 여성장편소설을 중심으로 1960년대 소설의 지도를 다시 그려보고자 했다.
6·25 전쟁 서사가 1960년대에 재구성되는 방식의 중핵에는 윤리적 증여가 있었다. 4·19 혁명에서 촉발된 저항적 의지의 산물은 6·25 전쟁을 개인적 비극으로 지각하는 것을 넘어서 이데올로기적 쟁투로서 인식하게 하고, 동시에 그 안에서 이상적 공동체를 발견하게 했다. 6·25 전쟁을 다시 재현하며 강신재와 박경리 소설 속 여성인물들은 압도적인 재난으로서의 전쟁을 수동적으로 수용하던 자세를 넘어 사랑을 발견하는 수행성의 주체로 변이한다. 이 표면을 이루고 있는 것은 남녀 간의 낭만적인 사랑이다. 그러나 남성인물들이 히스테리적 생존열망이나 멜랑콜리적 이데올로기 속에서 이 사랑을 불식시킨다면, 여성인물들은 섹슈얼리티를 이데올로기에 과잉 충실한 방향으로 소비하거나, 친족에 대한 공적인 애도 가능성을 물음으로써 근친애적 욕망을 기입시킨다. 이 윤리적 증여 양식은 이데올로기적 정치체와 민족 국가의 허상을 드러내며, 그 구성적 외부로 자리하는 무위의/잠재적 공동체를 상상하게 만든다.
4·19 혁명 서사는 여성작가들에게 4.19 혁명이 재현되는 방식이 사회를 해체하고 재생산하는 증여임을 드러낸다. 남성인물들에게 혁명은 영웅이 될 수 있는 기회로 작동한다. 그들은 국가라는 공동체를 위해 자신을 바침으로써 매개나 분열 없이 동일성 안에 통합되고자 한다. 그러나 그 애국성을 이루는 기반은 지극히 사적이고 충동적인 것이다. 반면, 혁명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는 위치에 놓여있었던 여성인물들의 죽음은 네이션에 통합될 수 없는 우울증적 성격을 강하게 띄며, 괴물적인 희생양으로서 자신을 재구성한다. 무엇보다 여성 작가들은 혁명의 장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던 민중들에 주목한다. 강신재는 4·19에 희생된 젊은이를 자식으로 둔 어머니들에 감정 이입을 유도하며 기억의 정치를 수행하고, 박경리는 계몽되지 않는 여성 주체를 4·19 세대가 껴안아야 할 정치적 공공재로 발견함으로써 야생성의 정치를 보여준다. 이를 통해 두 작가는 정치 이전의(pre-political) 영역에 있던, 공적 영역에서 배제된 인민들과 시골(자연)의 주변부적 위치성을 새롭게 사고한다. 이렇게 구성된 애도와 비(非)계몽의 공동체는 사회적 실재를 구성하고 재생산한다.
5.16 쿠데타 이후의 서사는 선물이라는 불가능한 증여를 바탕에 두고 이루어진다. 5·16 쿠데타 이후 자리 잡은 정치체제의 폭력적 통치성은 이에 적응한 개인들의 체제순응적 태도와 나란히 놓여 있었다. 남성인물들은 근대적 개발주의 앞에서 미에 대한 극단적 추구와 함께 병리적 통치성을 발휘하거나, 속물로서의 생존을 도모한다. 반면, 여성인물은 사회적 규범에 충실한 증여를 죽음에 이를 때까지 과잉 수행하며 마조히즘적으로 저항하고, 예술을 세속화시키며 도시 바깥에서 사회사업에 대한 결심에 이른다. 5·16 쿠데타 이후 서사에서 박탈의 수행성은 기존 예술의 미학적 자율성을 재편한다. 그리고 도시에서 벌어지는 자본의 투쟁 역학과 한국의 근대화에 맞춰진 여성담론으로부터 벗어나는 감각과 헤테로토피아적 공동체를 구성한다.
이와 같이 본 연구는 1960년대 여성장편소설 안의 증여와 젠더수행성이 발현되는 양상을 통해서 정치성의 젠더적 전환을 시도하였다. 이를 통해 1960년대 교양소설 담론이 이분법적인 성별 구도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 대해 문제제기하고, 기존 남성서사의 자기실현적 교양과는 변별되는 윤리를 제시하며 아포리아를 돌파하고자 했다. 또한, 6·25를 경험한 다양한 기성세대와 여성을 포괄하는 다양한 문학적 주체들을 드러냄으로써 4·19세대가 구성해놓은 문학적 주체의 외양을 확장했다. 이 과정에서 1960년대 여성서사가 도시와 시골의 이분법적 대립구조를 넘어서, 유기체적인 자연의식을 지니고 있었음을 드러낼 수 있었다. 이는 여성과 자연을 함께 묶어 타자화시키고 계몽의 대상으로 바라봐 온 한국문학의 근대성을 탈구축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예술의 자율성이라는 원리에 입각해서 ‘미적 근대성론’을 구성해온 남성적 신화에 대한 문제제기와도 연관된다. 예술의 자율성이 관망의 생존술로 작동했던 맥락을 드러내고 해체하고자 하는 작업은 1960년대 이래 고착된 문학의 미적 규율을 재성찰 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강신재와 박경리의 1960년대 장편소설이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을 가로지르는 증여를 통해 시장논리를 넘어선 사회연대의 토대를 포착하고 있다는 사실은 남성작가들의 단편 중심으로 연구되어왔던 1960년대 소설에 대한 해석의 층위를 다양화한 것이다. 이를 통해 개인이 아닌 공동체의 윤리와 미학적 정치성을 드러내고, 혁명과 여성의 연결고리를 재구할 수 있었다.
목차
I. 서론 1
A. 연구목적 및 연구사 검토 1
B. 연구방법 및 연구대상 14
II. 6.25 전쟁 서사의 윤리적 증여와 모순적 수행성 21
A. 교착된 사랑과 무위의 공동체 : 강신재 임진강의 민들레 21
1. 히스테리적 생존 열망과 유예되는 네이션 21
2. 과시적 증여와 심미적 윤리 26
B. 의지적 사랑과 잠재적 공동체 : 박경리 시장과 전장 31
1. 전장의 남성혐오와 멜랑콜리적 이데올로기 31
2. 시장의 상호성과 순수증여의 윤리 37
III. 4.19 혁명 서사의 사회 재생산 증여와 희생의 수행성 44
A. 부패한 권력과 애도의 공동체 : 강신재 오늘과 내일 45
1. 죽음으로의 도피와 환영적 애국심 45
2. 저주받은 희생양과 기억의 정치 49
B. 오염된 전통질서와 비(非)계몽의 공동체 : 박경리 노을진 들녘 55
1. 근친상간의 죄의식과 충동적 애국심 55
2. 근친애의 수긍과 야생성의 정치 60
IV. 5.16 쿠데타 이후 서사의 불가능한 증여와 박탈의 수행성 65
A. 근대적 개발주의와 감각의 공동체 : 강신재 숲에는 그대 향기 66
1. 추의 미학과 병리적 통치성 66
2. 죽음의 증여와 마조히즘적 저항 70
B. 도시의 속물주의와 헤테로토피아적 공동체 : 박경리 녹지대 73
1. 속물의 미학과 무력한 생존술 73
2. 예술의 세속화와 명랑한 증여 79
V. 1960년대 여성소설의 증여와 젠더 수행성 85
VI. 결론 96
참고문헌 101
ABSTRACT 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