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년 : | 20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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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 | 학위논문 |
학술지명 : | 장로회신학대학교 대학원: 기독교와 문화 (석사) |
관련링크 : | http://www.riss.kr/link?id=T11583086 |
낙태 문제에 대한 조셉 플레처(Joseph Fletcher)의 상황윤리(Situation Ethics) 관점에서 본 이해와 비판
저자 지장규, Fletcher, Joseph
형태사항 86 p.; 30cm
일반주기 참고문헌: p.83-86
학위논문사항 학위논문 (석사)-- 장로회신학대학교 대학원: 기독교와 문화 2008
DDC 241.707 21
발행국 서울
언어 한국어
출판년 2008
소장기관 장로회신학대학교 도서관 소장기관정보
초록
사회가 복잡해지고 과학이 발달할수록 이러한 선택과 갈등의 상황도 더욱 어려워진다. 특히 생명 현상에 대한 윤리적 판단은 쉬운 일이 아니다. 생명과학의 발달은 현대인들이 더욱더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인간의 삶을 더욱더 비인간적이고 불행하게 만들고 있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중 생명의료 윤리의 문제 중에 낙태(Abortion)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본 논고에서는 이러한 윤리적인 문제 특히 낙태에 대한 문제를 상황윤리적인 입장에서 접근하고 고찰하였다. 낙태에 대한 찬반 입장에 대하서 이야기 하면서 다음과 같은 3가지의 중요한 논쟁점이 있다. 즉, 생명시작에 대한 문제, 생명우선론과 선택우선론의 문제, 그리고 어려운 상황가운데의 낙태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한 일련의 문제를 단순히 율법주의적인 접근으로 단적으로 이야기 하는데는 21세기의 무수히 많은 상황하에서 한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한계상황가운데 우리는 상황윤리를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게된다. 상황윤리는 말 그대로 그 문제가 이루어지고 있는 현재의 상황을 중시한다. 현대 의료기술은 환자에서의 기술적용의 결과만을 중요시하고 삶을 가능케 하거나 죽음을 요구하는 환자의 내적 상황에 대하여 고려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기존의 율법주의와 같이 형식과 규율을 중요시하는 환경에서는 그 상황이 나타내주고 있는 본연의 본질을 볼 수 없게 될 것이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더 중요한 것이 상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상황이라는 것은 단순한 규율로 정의하고 규정하기는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우리주위에는 한 가지 일에 대해서도 너무나도 많은 상황이 생겨 날 수 있기 때문이다. 낙태를 해야 하는 상황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이러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치명적인 약점이 있는데 그것은 이것이다. 플레처의 상황윤리는 기독교 윤리학이라고 주장하지만 결국 절대적인 기준을 포기한 것이다. 상황윤리와 낙태의 문제 관계에 있어서 진정한 위험은 인격성에 대한 것이다. 그가 제시한 생명의 시작에 관한 그의 입장은 결국 절대적인 다른 규범과 기준을 동시에 포기하게 만들었다. 이들이 처음에 원한 것은 특별한 경우에만 관용의 차원에서 낙태를 허용한 것이다. 그 관용을 위해서 태아의 인격성을 포기한 것이다. 그러기에 규범성을 가지면서도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거시적인 관점의 새로운 윤리학적 모델을 찾아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제까지 낙태 문제를 원인과 현 상황 각종 야기되는 문제 그리고 낙태에 대한 여러 가지 입장을 성서적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이야기 해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낙태의 문제를 상황윤리라는 기독교 윤리의 관점에서 접근해 살펴보았다. 낙태에 나타난 생명 경시 풍조, 성 윤리의 부재, 물질 만능주의, 또 이런 사상들과 그것들을 은연중에 부추기는 구조적 모순은 세계고통의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낙태는 살인이다’라는 주장과 ‘낙태는 이혼과 마찬가지로 선택적인 행위일 뿐이다’라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낙태를 찬성론자들도 태아를 해치거나 생명을 빼앗는 것을 찬성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낙태를 찬성하는 사람들도 ‘낙태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이는 매우 어려운 선택이다. 임산부는 자신이 원해서가 아니라 필요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낙태한다’고 말하고 있다.146) 물론 앞서 계속해서 언급했듯이 낙태를 해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일어 날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낙태의 상황 가운데서 항상 상황윤리주의자들은 사랑을 기본으로 하는 선택을 요구하고 그에 대한 반응으로 결국 낙태를 결정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율법이 아닌 사랑이 행동을 지배할 때 모든 양심의 결정은 상황에 따라 달라지게 됨147)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사랑은 어디까지나 상황을 고려하여 모든 행동을 결정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거기서 나오는 답이라고 하는 것은 상황에 따라 상대적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상황윤리에 관한 많은 긍정적인 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계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이유이다. 물론 상황윤리 관점에서 낙태의 문제를 접근하는 것이 무조건적인 비판의 대상은 될 수 없다. 그 상황이라고 하는 것은 어쩜 우리를 이끌고 있는 규율이나, 규칙, 율법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상황윤리의 관점에서 낙태를 접근하는 것에 문제가 있다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플레처가 보여주는 상황윤리의 취약점은 바로 더 넓은 차원의 사회 전체로서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상황을 너무 협소하게 이해하여 고립된 특정적 순간으로만 간주하기 때문에 극한적 상황에서 정당성을 인정받는 예외적인 행동을 근거로 하여 일반화된 논리를 전개하게 되며 결국에는 모든 규범을 무시하는 도덕률 폐기론에 이를 수 있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결정적으로 낙태 문제에 대한 상황윤리의 취약점은 생명의 시작점을 보는 관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태어나지 않은 태아를 인격의 한 지체로 보지 않는데서 이러한 낙태에 관한 입장을 펼치게 된다는 것이다. 잉태된 태아를 생명으로 보지 않고 죽일 수 있다면 이미 태어난 아기를 죽이지 못할 이유가 없다. 인구가 너무 많다고 해서 태아를 죽일 수 있다면 같은 이유로 병든 사람들과 노인들을 다 죽일 수 있을 것이다. 가장 기본적인 인권은 바로 생명에 대한 권리이다. 개인의 이익이나 공동체의 이익을 위한 것일지라도 이 인권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 국가의 최고 사명이 국민의 생명권을 보장하는 일일진대, 자기 자신을 보호하지 못하는 태아의 생명은 그 누구보다 국가의 보호를 받아야한다. 그 방법이 아무리 어렵고 또 더 큰 희생을 요구한다 하더라도 태아의 생명을 빼앗으면서까지 우리는 그 어떤 것도 도모해서는 안 될 것이다. 천하를 얻고도 한 생명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제는 우리가 그리고 교회가 생명을 수호하는 일에 앞장 서야 할 것이다. 생명은 하나님께로 왔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어떠한 이유에서도 합리화 될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