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제약산업을 움직인 사람들…학계·업계 설문조사
국내 제약산업은 2012년 한 해도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 양상은 강력한 규제와 자발적인 혁신 사이에서 절박한 생존의 길을 찾는 것이었다. 이제 한 해를 마감하고, 새로운 정권의 출범을 앞둔 시점에서 조선일보 산업부 제약바이오팀은 국내 제약산업을 결산하는 설문조사를 했다. 주제는 '지난 10년간 한국 제약산업을 움직인 사람과 기관, 신약은?'.
설문조사는 '국내 제약산업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문항 등 총 7개 문항마다 1위부터 3위까지 추천을 하도록 했다. 1위는 3점, 2위는 2점, 3위는 1점으로 계산해 합계를 내는 방식으로 순위를 정했다. 설문 대상은 매출액과 연구개발(R&D) 투자 규모 등을 기준으로 한 국내 10대 제약사 최고경영자(CEO)와 연구소장으로 정했다. 학계를 대표해 서울대 약대 정진호 학장과 경희대 약대 정서영 학장도 참여했다. 참여 제약사는 동아제약·녹십자·대웅제약·유한양행·한미약품·종근당·JW중외제약·LG생명과학·일동제약·보령제약이다.
◇제약산업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
임채민 보건복지부 장관이 압도적인 1위로 꼽혔다. 지난해 9월 장관직에 올라 올해가 임기 2년차지만, 제약업계 관계자들은 지난 10년을 통틀어 가장 영향력이 강한 인물로 주저 없이 임 장관을 꼽았다. 임 장관은 지난 4월 1일 정부가 약값을 일괄적으로 15~17% 인하하는 초유의 '약가 인하'를 단행했다. 이 여파로 올해 제약업계는 유례없는 역(逆)성장을 기록할 만큼 몸살을 앓았다. 내수시장은 거의 폭격을 당한 처지였다. 이번과 같은 일괄적인 약가 인하는 제약업계 역사상 전례가 없었다. 업계에서는 "정부가 아예 제약산업의 씨를 말리려는 것 아니냐"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반면 제약시장이 투명해지고 제약사들이 판에 박은 복제약 일변도 전략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생존전략을 개발하는 등의 긍정적인 면도 나타났다. 실제로 올해 제약사들은 약가 인하로 내수시장에만 기댈 수 없게 되자 해외시장에 눈을 돌려 수출이 급증했다. 임 장관의 전임자인 진수희 전 복지부 장관과 제약시장 투명화 방안을 강력하게 추진한 이명박 대통령이 각각 영향력 2, 3위에 올랐다.
◇제약산업에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친 기관
예상대로 보건복지부가 압도적 1위, 식품의약품안전청이 2위였다. 규제산업인 제약산업의 특성상 두 기관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눈에 띄는 것은 LG생명과학이 공동 2위에 오른 점. LG생명과학은 매출 순위로는 8~10위권 제약사에 불과하지만, 매출 대비 R&D 지출이 20%로 국내 제약사 중 독보적인 1위를 유지하는 연구개발 중심형 제약사다. 응답자들은 한국 제약업계 역사상 첫 미국 식품의약국(FDA) 승인 신약인 '팩티브'(항생제)를 개발, 신약 역사를 개척한 도전정신에 높은 점수를 줬다. 2003년에 미국 FDA 승인을 받은 팩티브는 비록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우리도 세계 최대 시장을 직접 공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제약산업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CEO
한미약품 임성기 회장, 동아제약 김원배 사장이 1위를 놓고 접전을 벌였으나 근소한 차이로 임 회장이 1위에 올랐다. 임 회장은 의약분업 이후 복제약과 개량신약을 앞세운 공격적인 경영으로 2001년 당시 10위권 밖이던 한미약품을 2007년 2위 제약사로 급성장시킨 공로를 인정받았다. 한미약품은 200개의 제품 중 수입 약은 3.2%인 7개에 불과할 정도로 제조 비중이 높다. 임 회장은 국내 제약시장의 이슈를 선점하고 리드해왔다는 평가도 나왔다. 반면 임 회장이 제약시장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도 있었다. 공격적인 영업으로 제약시장을 교란했다는 평가들이 나왔다.
2위에 선정된 김원배 사장은 연구소장 출신으로 가장 성공한 CEO로 꼽힌다. 김 사장에 대해서는 "전문경영인으로 업계 1위인 동아제약을 8년간 이끌어 왔으며 연구소장 때는 '스티렌'과 '자이데나' 등 시장성이 큰 신약을 개발한 공로가 크다"는 평가가 나왔다. 3위는 셀트리온의 서정진 회장이 꼽혔다. 서 회장은 셀트리온을 국내 대표적인 바이오시밀러(바이오의약품 복제약) 기업으로 이끌고 류머티즘 관절염 치료제 '램시마'의 상용화에 성공했다.
◇R&D에서 가장 혁신적인 사람
한미약품은 신약과 복제약이라는 두 가지 선택밖에 없었던 국내 제약시장에 개량신약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미약품의 R&D를 대표하는 인물이 이관순 사장이다. 국내사는 글로벌 제약사 100분의 1 수준의 개발비로 신약 개발이 요구하는 막대한 비용과 그에 따른 리스크를 감당할 여유가 없다. 그렇다고 복제약에만 매달려 좁은 국내 시장을 나눠 먹자니 글로벌 시장으로 도약할 길은 사라질 게 뻔했다. 이 사장은 신물질 개발보다는 제품의 형태나 복용법 등을 달리해 효능을 더욱 높이는 개량신약 기술을 개발하자는 '한국형 R&D'를 주창했다. 동아제약 김원배 사장과 줄기세포 치료제 개발 업체인 메디포스트 양윤선 대표가 공동 2위에 뽑혔다. 의사 출신인 양 대표는 올 초 국내 최초로 다른 사람의 줄기세포로 만든 치료제를 허가받았다.
◇영업에서 가장 혁신적인 사람
‘영업의 한미’로 불리는 한미약품 특유의 공격적 영업문화를 만든 임선민 전 한미약품 사장이 압도적인 1위에 올랐다. 임 전 사장은 말단 영업사원으로 시작해 CEO 자리에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 응답자들은 “임 전 사장이 국내 제약사의 성장 가능성을 보여줬다”고 평했다. 임 전 사장은 그러나 정부의 반(反)리베이트(약품 채택 대가로 제공하는 금품) 규제가 강화되면서 지난 2010년 사장직에서 물러났다. 제약업계 트렌드가 연구개발(R&D) 중심으로 바뀌는 시점이었다. 당시 그의 퇴임을 두고 제약업계에서는 “이제 영업의 시대는 갔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가장 혁신적인 연구자
서울대 약대 김성훈 교수(분자의학 및 바이오제약학)가 단연 1위였다. 김 교수는 거대한 자본과 인력이 필요하고 실패 확률도 높은 고위험·고비용 구조를 대체할 신약 개발 모델을 만들고 있다. 임상시험 전(前) 연구의 세 단계를 한 다발로 묶어 동시에 진행하는 ‘융합형 개발’로 보통 12년이 걸리는 개발기간은 7년 반~9년으로 줄이고, 개발비는 5분의 1로 줄이자는 것이다.
김 교수는 획기적인 신약 타깃(target·약물 적용 대상)을 찾는 부문에서도 큰 성과를 내고 있다. 특히 2005년 세계 최고의 생명과학 학술지인 ‘셀(Cell)’에 발표한 ‘p18’이라는 유전자는 세계 암 학계를 놀라게 했다. 인체는 몸속 세포가 고장 나면 문제가 생긴 세포의 성장을 중지시키고 DNA를 수리하여 재가동하거나, 수리가 어려운 세포에는 ‘자살 명령’을 내린다. 김 교수는 이런 항암작용을 좌우하는 p18을 세계 최초로 발견했다. 의사 집안 출신인 그는 ‘명의(名醫)는 평생 수천 명을 살리지만 뛰어난 약은 수백만 명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해 서울대 약대에 진학했다. 2018년까지 매년 100억원 이상을 지원받는 초대형 연구단인 혁신형 의약 바이오 컨버전스 연구단을 이끌고 있다. 2위는 마이크로RNA 연구에서 세계적인 성과를 내고 있는 서울대 생명과학부 김빛내리 교수<사진 오른쪽>가 선정됐다. 김 교수는 기초과학연구원 연구단장으로 선정됐다. 3위에는 길리어드 재직 당시 신종플루 치료제인 ‘타미플루’를 개발한 김정은 카이노스메드 수석부사장이 뽑혔다.
◇가장 기대되는 신약 파이프라인
동아제약의 수퍼항생제 ‘DA7218’과 발기부전치료제 ‘자이데나’가 1, 2위를 차지했다. 수퍼항생제는 기존 항생제가 듣지 않는 병원균을 치료하는 약으로, 현재 미국과 유럽에서 글로벌 임상 3상시험이 진행 중이다.
국내 첫 발기부전치료 신약인 자이데나는 효능을 전립선 비대증과 고혈압 치료제로 넓혀 미국에서 임상시험을 진행하고 있다. 3위는 LG생명과학의 당뇨병 치료 신약인 ‘제미글로’가 뽑혔다. 경쟁 제약사들도 “안전하고 효과 좋은 당뇨병 치료제”라고 후하게 평가했다.